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뤼흐 스피노자 (문단 편집) == 생애 == 스피노자의 조상은 [[포르투갈]] 유대 [[세파르딤]] 혈통으로서 유럽의 종교개혁기에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떠나 그나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정착을 한 집안이었다. 뒤늦은 정착에도 아버지의 사업은 성공하여 네덜란드 유대인 사회 내에서 꽤 자리를 잡았었다. 그후 아버지는 일찍 사망하게 되지만, 젊은 스피노자는 아버지 사업의 후계자로 인식되고 있었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나 랍비가 될 재목으로도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을 부정하고 유대교 교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24세에 파문을 당해 유대교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그는 낮에도 저주받고 밤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잠잘 때도 저주받고 일어날 때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인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항상 그의 죄에 노여워하실 것이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를 덮쳐 그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 >1656년 7월 27일, 스피노자가 유대교회의 종교의식에 따라 파문되었을 때, 파문 문서 내용 중에서... 율법서에 나오는 거의 모든 저주를 퍼부었던 그 유명한 파문은, 유대인 사회를 통틀어 살펴봐도 가장 가혹한 파문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러한 파문과 함께 유대인 사회는 그와 교제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였다. 당시 유대인은 관리가 될 수 없었으므로, 유대인 사회에서 파문 당해 쫓겨난다는 것은 곧 생계 수단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도 파문 당한 사람과 거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피노자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신앙심을 증명하려는 한 광신자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스피노자는 살아남았다. 이후 스피노자는 잠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렌즈 깎는 기술을 배운 뒤 부터는 하숙집 다락방에서 은거하면서 렌즈갈이를 직업 삼아 극히 단순한 생활을 반복했다.[* 당시 렌즈는 막 꽃피던 근대과학 초창기의 인기 품목이었던 현미경이나 망원경에 쓰이는 핵심 부품이었다.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렌즈 가공은 생계 유지 수단인 동시에, 광학(光學)에 대한 그의 과학적 관심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스피노자는 [[하위헌스 원리]]로 유명한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등과도 교류를 나누기도 했다.] 가끔 피우는 담배가 유일한 취미였다. 렌즈 가공을 하고 남는 시간엔 책상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거나 철학을 연구했었고, 때때로 친구들이나 다른 질문자들과 서신을 주고 받는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다락방의 합리론자'라는 그의 별명은 여기에서 나왔다. 또한 하숙집 주인 가족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고 온화한 철학자로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유대인 사회와는 단절이 되었고 가족도 그와 연을 끊었지만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삶은 아니라서, 여러 친한 친구들이 있었고 스피노자 연구 모임이 있을 정도로 사상적인 팬들도 있었다. 생계도 렌즈 가공만으로 유지된 건 아니고 친구와 지지자들이 [[연금]] 형식으로 보낸 돈도 많은 보탬이 되었기에, 풍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난에 시달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딱히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다. 수중의 돈은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전부 서적을 구매하는데 사용했고, 옷차림 또한 검소해서 외출용 옷과 평상시 입는 옷 두벌만 가지고 있었다.[* 평상시 입는 옷은 수선을 잘 하지 않아 주변인이 새옷 안필요하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의 철학은 상대적으로 관용적이었던 네덜란드에서조차 위험했기 때문에 그의 책이 떳떳하게 출판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신학정치론』은 익명으로 출간되었으나 큰 논란을 일으켰고 그의 대표 저서인 『에티카』는 출간을 시도하다 포기하여 사후에 출판된다. 생전에 그의 이름으로 출간한 책은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가 유일하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데카르트 철학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 책을 저술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는 이 책을 통해 데카르트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독일 팔츠 선제후국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로 초빙을 받기도 하였으나, 한달 정도 고민하다가 거절한다. 이 때 쓴 사양하는 편지도 유명하다.[* "혹시 언젠가 저에게 대학 교수로 종사할 희망이 생기게 된다면, 당신을 통해 팔츠 선제후 전하께서 저에게 권해 주신 대학의 교직만을 원할 것입니다. 특히 더없이 자비로우신 전하께서 승인해 주신 철학의 자유를 위해서 저는 그렇게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총명함을 찬탄하는 각하의 치하에서 생활하기를 이전부터 바라고 있었다고 지금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공적으로 교수할 생각은 결코 없었기에, 사정을 장시간 숙고하였으나 이 명예로운 기회를 삼가 받자올 결심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후략) 이후에 그가 거절한 이유가 나오는데 요약하자면, 첫째로 교수로 학생을 가르치다 보면 철학에 전념할 수 없다. 둘째로 교수의 신분으로 종교에 혼란을 가져오지 않는 연구를 진행하기 어려울것 같다. 셋째로 자신은 이미 고독한 생활속에서 수많은 반발을 겪었는데, 교수라는 명예로운 자리에서 더 많이 받을 반발과 탄압이 고민된다. 이후 편지에서 이 제안을 6주 동안 고민했으니 그만 고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4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이를 두고 렌즈를 가공하면서 생기는 유리가루를 많이 마셨던 것이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형도 폐질환으로 사망한 것을 토대로 가족력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말년에 그는 자주 아팠기에 스스로의 죽음을 예상했는지, 재산을 정리해 놓았다.[* 이후 생전 보지도 않던 스피노자의 누나가 유산을 가지러 달려왔으나, 스피노자는 자신의 장례금빼고는 철저히 계산하여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의 공포는 필연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다'는 그의 철학을 스스로 증명하기라도 하듯, 죽는 날 당일에도 평소처럼 닭고기 수프를 맛있게 먹고 친구인 의사와 하숙집 주인과 잡담을 나누기도 하다가, 저녁 때 보니 죽어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